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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시대의 정신과 의사와 정신분석:정신과 의사의 독자적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의 필요성

  • 12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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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2026-08-16

 

서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창시한 이래 약 140년 동안, 정신분석은 심리적의학적 치료법인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 더 나아가 현대 문화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류의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정신분석의 영향은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 예술, 철학, 종교, 역사와 사회 현상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신분석적 개념과 사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확장은 정신분석이 이룬 중요한 성취이다. 서로 다른 학문적·전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정신분석을 자신의 영역에 접목함에 따라, 정신분석은 새로운 질문과 관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신분석을 문학과 예술, 역사와 사회, 종교와 문화의 이해에 적용하는 연구뿐 아니라, 최근에는 신경과학, 과학기술,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영역과의 접점도 활발히 탐색되고 있다. 정신분석의 이러한 다학제성과 개방성은 현대 정신분석이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전문적 배경과 임상 경험에 기초해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독자적인 학술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정신분석이 인간과 문화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 확장되어 온 것과 별개로, 정신분석이 히스테리 증상의 의학적 치료에서 출발하였으며 정신의학의 역사와 긴밀한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정신의학의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접점에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 고유의 임상 경험을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연구, 교육, 훈련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분석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제기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직역에 대한 자격 제한은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에 지원할 자격을 의사에게만 허용했던 과거 미국정신분석협회의 제도는 현대에 이르러 정당한 비판과 도전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들만의 정신분석 학술단체또는 훈련체계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것을 배타적 의료주의로 회귀하려는 주장과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특정 직역에 독점적으로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 다학제적 발전과 직업적 배경에 따른 비차별의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정신과 의사만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정신과 의사를 위한 고유한 분석가 훈련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 주장이다. 정신과 의사는 의학과 정신의학 훈련을 통해 형성된 고유의 임상적 책임과 관점을 지니며, 이러한 전문적 기반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적 정체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다양성의 확대가 각 전문 분야의 고유성을 희석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안 된다. 진정한 다양성은 서로 다른 전문적 배경에서 비롯된 차이와 고유성을 인정하고, 각 전문적 전통 아래에서 자신의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대화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정신분석의 개방과 비차별의 역사적 의미

 

이 문제는 1980년대 미국 정신분석계에서 벌어진 비의사 정신분석가 훈련을 둘러싼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정신분석협회(Americ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APsA)는 오랫동안 정신분석 훈련을 의사 중심으로 운영해왔으나, 이러한 정책은 심리학자를 포함한 다른 전문 분야의 참여를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Agrawal(2024)은 APsA가 1911년 창립 이후 1989년까지 회원자격을 의사에게 제한하였으며 , 1980년대의법적 분쟁을 거쳐 1989년부터 비의사에게도 의사와 동일한 기준으로 정신분석 훈련의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비의사에게 정신분석 훈련을 개방하면서 정신분석의 이론적·임상적 발전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고, 동시에 큰 도전이시작되었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서 APsA 회장(1980-81)을 역임한 Cooper(1990)는, 미국정신분석의 탈의료화가본격화되던 시기에 이것이 정신분석의 전문적 정체성과 정신의학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을 일찍이 주목하였다. 그는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의사가 아닌 많은 창조적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우려하는 것은 비의사 분석가의 존재가 아니라, 미국에서”정신의학적 정신분석(medical psychoanalysis)”이라는 독자적인 전문적 조직적 정체성이소멸할 때 나타날 결과라고 하였다.

 

Cooper는 특히 의학적 인프라와의 단절이 가져올 ‘연구의 위기’를 경고했다. 그는 정신분석이 의과대학 및 대학병원의 체계적인 연구 시스템에서 소외될 경우,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한 임상 연구보다는 인문학적 해석에 치중하는 ‘연성 연구(soft research)’로 흐를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대 의학이 요구하는 증거 기간의 치료 효과 입증을 어렵게 만들어, 보건 정책이나 보험 체계 내에서 정신분석의 학문적 신뢰성과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개방성과 다학제성을 인정하는 것과 정신의학적 정신분석의 고유한 전통과 역할을 보존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과제가 아니다.

 

Sabshin(1985) 역시 당시 비의사 후보자에 대한 개방을 둘러싼 논쟁을 단순한 찬반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는 비의사 후보자에게 정신분석 수련을 폭넓게 개방하는 변화가 장기적으로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유대를 약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정신분석이 더 이상 의료분야와 긴밀히 연결된 전문영역으로 인식되지 않을 경우, 의사들이 정신분석 훈련을 선택할 동기역시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관계가 약화될 경우 양쪽 모두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두 분야가 결별하기 보다는 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관계를 새롭게 구성해야한다고 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을 정신의학의 하위영역으로 환원하는 것도, 반대로 정신의학과의 연결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진단, 치료 선택, 약물 치료와 정신 치료의 통합, 신경과학과의 관계 등 임상 현실에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이 서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자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비차별의 역사적 성취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정신분석가로서의 자격과 가치를 출신 직역에 따라 위계화해서는 안되며, 정신과 의사, 임상심리학자, 사회복지사, 인문학자 등 다양한 배경의 전문가들이 정신분석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직역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과 서로 다른 전문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동일한 문제가 아니다. 각 전문 분야는 서로 다른 교육과 임상 경험, 책임의 범위 속에서 정신분석에 접근한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 시대에 정신분석의 성숙을 위한 전제일 수 있다.

 

비차별 정책의 성취와 역설

 

정신분석계의 비차별 정책은 다양한 전문 분야 출신의 정신분석가가 등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정신분석은 의료 전문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문화에 관한 보다 폭넓은 학문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다양성의 확대에는 또 다른 과제와 도전이 뒤따른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어느 한 전문 분야가 지닌 고유한 경험과관점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린다면, 오히려 다양성의 기반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

 

비차별(Non-discrimination)은 차이의 부정(Non-differentia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분석은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인 동시에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도구이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병리와 진단, 신체질환과 정신질환의 감별, 약물치료, 자살 및 응급상황의 평가와 개입, 다양한 치료방법 사이의 선택과 통합에 대한 책임을 진다. Sabshin(1985)은 바로 이러한 진단과 치료적 분류의 문제를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의관계에서 핵심적인 쟁점으로 보았다. 정신분석적 기법의 능숙함과 별개로, 어떤 환자가 정신분석에 적합한지, 정신치료가더 적절한지, 약물치료나 다른 의학적 개입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임상적 책임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의 이러한 특수성은 실제 전문단체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American College of Psychoanalysts는 1969년 정신과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들을 위한 조직으로 설립되었다(Clemens 2016). 이 단체는 정신과 의사의 정신분석적 실천이 의과대학과 전공의 수련을 통해 형성된 진단적 관점,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한 관심, 정신약물학과정신분석의 통합, 그리고 경험적 연구에 대한 친숙성이라는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고 보았다. 동시에 심리학자와 사회복지사 출신 정신분석가들이 자신의 전문조직을 갖는 것처럼 정신과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가 고유한 공동체를 갖는 것은 정신분석 전체의 다양성과 양립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이는 전문적 고유성을 보존하는 것이 다른 직역을 배제하거나 위계화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다학제성을 발전시키는 것과 각 전문 분야가 자신의 고유한 임상적 학문적 전통 속에서 정신분석을 발전시키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 역시 자신의 의학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석가라는 두 전문적 정체성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이 개인에게만 맡겨져서는 안되며, 교육과 제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의 임상적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할 학술 단체 뿐 아니라 그 고유 전문성을 정신분석가 형성과정에 반영하는 독자적 훈련체계가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의 정신분석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

 

미국 정신분석의 탈의료화와 정신과 의사 지원자의 감소는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Cooper(1990)에 따르면 1978-1979년부터 1987-1988년까지 약10년 동안 미국의 정신분석 훈련 전체 지원자가 30% 감소하였고, 이중 비의사 지원자는 두배로 증가했고 의사 지원자는 약 50% 감소하였다. 이 수치를 단순히 비차별 정책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지만, Cooper는 이를 정신분석의 ‘탈의료화(demedicalization)’라는 보다 광범위한 변화와 연관지어 해석하였다. 그는 정신분석이 더 이상의학적 전문영역으로 인식되지 않을수록, 오랜 의학교육과 정신과 수련을 마친 젊은 정신과 의사들이 기존 의학교육과의연속성을 느끼기 힘든 정신분석 훈련을 선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우려하였다.

 

Cooper(1990)의 우려는 단순히 정신과 의사 수의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들이 줄어들수록 정신분석이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전공의 교육, 임상 연구와 점차 멀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정신분석의 임상적과학적 기반도 약화될 수 있다고 예견하였다. 특히 정신분석 연구는 대학과 의과대학의 연구 인프라, 임상적 자원, 과학적 훈련과의 연결을필요로 하므로, 정신의학과의 관계 단절은 정신분석의 연구 역량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Kernberg(2006) 역시 정신분석 교육기관이 정신의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그 결과 새로운 정동연구, 생물학적 정신의학과의 대화에 제약이 생겼고, 이런 지적 고립은 정신분석의 창조성과 과학적 발전의 저해를 가져왔다고 했다.

 

오늘날 정신과 의사와 정신분석 사이의 거리는 정신의학 내부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현대 정신의학은 생물학적 의학, 정신약물학, 신경과학 및 근거중심의학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해 왔다. 이러한 발전으로 정신질환의 치료와 연구에 중요한성취를 이루었지만, 환자의 주관적 경험과 무의식적 의미, 관계적 맥락을 깊이 탐색하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Sabshin(1998)은 미국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 ‘심리적 이해 역량(psychological mindedness)’이 감소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가 말한 심리적 이해 역량이란 아동기 경험, 주요 정동, 방어, 성격구조, 전이와 같은 심리적 과정들 사이의의미와 인과적 연결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는 이 능력이 생물학적 정신의학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것이며, 정신분석가들이 의과대학과 정신과 전공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문제는 최근에도 현재진행형이다. Agrawal(2024)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정신과 의사들의 정신분석적 관심이 꾸준히 감소해 왔는데, 미국정신분석협회가 이를 새로운 도전으로 인식하고, 2023년 의대생들의 정신역동적·정신분석적 사고에 대한관심을 장려하기 위해 Michael Balint Scholarship을 신설했다고 보고하였다. 첫 2년간 각각 25명, 31명의 의대생이 지원했는데, 이는 의대생들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의대생들이 정신분석을 접하고, 그 관심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경로와 전문적 모델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정신과 의사를 위한 분석가 훈련의 필요성

 

정신과 의사를 위한 독자적인 분석가 훈련의 필요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정신분석 교육 전체를 직역별로 폐쇄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핵심은 정신과 의사에게 요구되는 분석가 훈련이 일반적인 정신분석 이론과 기법의 습득에 그치지않고, 정신의학적 진단과 정신병리, 약물치료, 신체와 마음의 관계, 위험평가와 치료적 의사결정이라는 기존의 전문성과 정신분석적 사고를 통합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Kernberg의 정신분석 교육에 대한 비판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Kernberg(1986)는 정신분석 교육이 개방적인 과학적 탐구보다 교조적 전수에 가까워질 위험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 연구기관이 ‘신학교’나 폐쇄적 기술학교가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고 탐구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형’ 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모델에서 정신분석 교육은 특정 학파의 권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론과 기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최신 임상 및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며, 치료자로서의 기술과 연구자로서의 태도를 함께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정신과 의사들만의 정신분석 공동체 역시 단순한 직역 보호단체가 아니라, 정신의학이라는 전문적 기반 위에서 정신분석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학술 공동체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Kernberg(2006)는 정신분석 교육의 권위주의, 과도한 위계화, 연구의 경시, 외부 학문과의 단절이 수련생의 창조성과 전문적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다시 강조한다. 특히 그는 정신분석가의 정체성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집단치료, 부부치료, 신경과학과 같은 새로운 관심을 배척하는 것은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에 기반한 보수주의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점은 정신과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들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신과 의사가 정신분석가가 되었다고 해서 정신의학적 진단, 약물치료, 신경과학, 의료윤리와 응급상황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분석가 훈련은 기존의 의학적전문성에 무의식, 전이, 역전이, 방어, 관계적 의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 하나의 임상적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지속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의사의 임상적 현실과 책임을 공유하는 훈련 분석가(training analyst)와 지도감독자(supervising analyst), 교육과정, 동료집단을 갖춘 훈련체계가 필요하다.

 

치료법으로서 정신분석의 정체성과 현대 정신의학

 

정신분석은 인간과 문화에 관한 이론이기 이전에 임상적 만남에서 출발하였다. 프로이트의 발견 역시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을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이후 정신분석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폭넓은 이론으로 발전했지만 치료적 실천은 여전히 정신분석의 핵심 토대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현대 정신분석이 다양한 학문과 문화 영역으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치료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할 수 없다.

 

특히 현대의 정신과 임상은 고전적 정신분석이 주로 다루었던 신경증적 환자보다 훨씬 폭넓은 환자군을 마주한다. 심각한인격병리, 자해와 자살 위험, 양극성 장애와 정신병적 상태, 발달장애, 신체질환과 정신질환이 복합된 환자들이 일상적인 정신과 진료의 대상이다. 이러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의사는 정신역동적 이해와 함께 진단적 판단, 위험도 평가, 약물 치료, 치료 환경 조정, 현실적인 치료 계획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Sabshin(1998)은 정신과 의사가 정신치료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분석뿐 아니라 정신의학의 미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고 보았다. 그는 정신과 의사가 심리적 이해 역량(psychological mindedness)과 분석적 기술을 평가절하하고 소홀히할 경우, 정신의학은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다루는 학문적 주도권을 잃고 단순히 ‘약물 처방가’에 머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정신의학이 생물학적 치료와 심리적 이해를 통합해 전인적 치유를 제공하는 독자적인 전문적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경우, 정신분석 역시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생물학적 치료와 정신치료를 통합하는 정신과 의사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잃게 된다면, 정신분석에서 ‘의학적 엄밀함’이 희석되고 과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를 통합하는 정신과 의사의 시각과 기술, 그리고 임상 경험은 비의사 분석가와 구분되는 중요한 특성이다. 이 영역에서 필요한 임상적·이론적 연구에 정신과 의사 출신 정신분석가들의 기여가 절실하며, 그들이 고유한임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Kernberg(2007)는 이러한 현대 임상 현실을 정신분석 교육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를 정신분석 훈련에서 배제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전통이 실제 임상에서 만나는 다수의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 역량을 충분히 길러주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표준적 정신분석과 정신분석적 정신치료의 적응증과 금기, 공통점과 차이, 치료기법을 높은 수준에서 함께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정신분석 기법의 특수성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하고, 임상가가폭넓은 환자군에 정신분석적 지식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Kernberg(2007)는 또한 정신분석 교육기관이 대학, 특히 정신의학과 심리학과의 연결을 회복하고, 정상 및 병적 정신발달, 정신병리, 치료기법뿐 아니라 신경과학과 정신약물학 등 인접 분야의 발전과 적극적으로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연구는 이 연결의 핵심이다. 정신분석이 임상적 경험과 해석적 전통 안에 고립될 것이 아니라, 임상과 자연주의 역사적해석학적 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폭넓게 발전시키고, 다른 학문과 협력하여 자신의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과 의사 중심의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체계는 분리될 수 없다. 학술단체는 정신분석과 현대정신의학, 정신약물학, 신경과학, 정신치료 연구를 연결하는 지적 기반을 제공하고, 훈련체계는 그러한 지식과 임상적 태도가 다음 세대의 정신과 의사 분석가에게 실제로 전승되도록 한다. 두 제도가 함께 작동할 때 정신과 의사는 정신분석적 심층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정신의학의 발전을 수용할 수 있고, 정신분석 역시 실제 정신병리와 치료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을수 있다.

 

정신과 의사만의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이 필요한 이유

 

이제 본 논문의 핵심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왜 정신과 의사만으로 구성된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정신과 의사를 위한 분석가 훈련 체계가 필요한가?

 

첫째, 정신과 의사의 의학적 책임과 정신분석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이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무의식과전이를 이해하는 동시에 정신병리, 신체질환, 약물치료, 자살 위험과 응급상황을 평가하고 다양한 치료법 가운데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복합적 책임이 정신분석 치료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 출신분석가들에게 고유한 과제이다. 독자적 학술단체는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장을 제공하며, 분석가 훈련체계는 이를수련생의 임상적 정체성 형성에 직접 반영할 수 있다.

 

둘째, 정신분석 안에서 정신의학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Cooper(1990)와 Sabshin(1985)이 우려한 것처럼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이 분리될 경우, 정신분석은 중증 정신병리, 진단, 약물치료, 의료체계와의 연결을 점차 잃을 위험이 있다. 반대로 정신의학 역시 무의식과 관계의 의미를 다루는 깊이를 잃을 수 있다. 정신과 의사만의 학술단체와 훈련체계는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분야의 접점을 제도적으로 유지해 상호 손실을 줄이기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세째, 정신의학 안에서 정신분석적 사고와 정신치료의 전통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승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Sabshin(1998)이 지적한 ‘심리적 이해 역량’의 약화는 정신분석만의 위기가 아니라 정신의학의 임상적 깊이가 약화되는문제일 수 있다. 환자를 진단명과 약물 반응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발달사, 관계, 방어, 욕망과 갈등의 맥락에서 이해하는능력을 유지하려면 정신과 의사 분석가들이 정신과 교육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개 분석가의 노력에 의존하기보다, 교육자와 지도감독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 안정적인 분석가 훈련 기반이 필요하다.

 

네째, 이러한 독자적 조직과 훈련은 정신분석의 다학제성과 모순되기보다 그것을 구현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Clemens(2016)가 기술한 사례는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정신과 의사 등 서로 다른 전문적 배경을 가진 분석가들이 각자의 전문 공동체를 가지면서도 더 넓은 정신분석의 장에서 공통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통합된 정신분석 공동체와 전문 분야별 공동체는 경쟁적 구조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각 공동체가 다른 직역을 배제하거나 위계화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전문성을 발전시키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분석을 다시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진로로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Agrawal(2024)이 소개한Michael Balint Scholarship은 의대생에게 정신역동적정신분석적 사고를 접할 구체적인 기회를 제공하려는 최근의 시도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일회성 경험에 그치지 않고 정신과 전공의 교육과 이후의 분석가 양성으로 이어지려면, 정신과 의사가 의학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신분석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진로 모델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를 위한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체계는 바로 그러한 전문적 경로를 가시화하고 지속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결론: 다양성과 고유성은 대립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역사는 확장의 역사였다. 정신분석은 의학에서 출발했지만 심리학과 인문학, 예술과 사회과학을 만나면서 훨씬풍부한 지적 전통으로 발전하였다. 정신분석 교육과 회원 자격의 문호를 넓게 개방한 변화 역시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러나 다양성을 보호한다는 것이 각 전문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차이와 고유성을 지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차별을비구분과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전문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등등한 정신분석가로 인정받는 것과, 그들이정신분석에 가져오는 서로 다른 지식과 책임, 임상 경험을 인정하는 것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오히려 성숙한 다학제적공동체라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전문적 정체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면서 서로 만나고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의사만으로 구성된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정신과 의사를 위한 분석가 훈련체계의 존재는 정신분석의다양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분석이라는 넓은 공동체 안에서 의학적정신의학적 정신분석이라는 하나의 전문적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그 목적은 정신과 의사가 정신분석으로부터 멀어지고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재의 간극을 줄이며, 두 분야 사이의 오래된 대화를 현대의 임상적과학적 조건 속에서 새롭게 이어가는 데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분석은 과거 정신의학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유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를 증상과 진단의 집합을 넘어 하나의 주체로 이해하게 하는 임상적 사고방식이며, 생물학적 치료와 심리적 치료를 한 사람 안에서 통합하게 하는 중요한 지적임상적 전통이다. 동시에 정신분석 분야에서 정신과 의사는 실제 정신병리, 의학적 진단과 치료, 신경과학과연구의 세계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정신분석이 다양한 전문 분야에 문호를 열어온 오늘날 필요한 질문은, 그 다양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전문적 전통이 자신의고유성을 충분히 발전시킬 제도적 공간이 보장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경우 그 공간은 단순한 친목적 공동체를 넘어, 독자적인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 체계라는 형태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정신과 의사만의 정신분석 학술단체와 분석가 훈련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학문적 태도, 현대정신의학과 신경과학에 대한 관심,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를 포함한 폭넓은 임상 역량, 그리고 다른 전문분야의 정신분석가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배타적 의료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과 의사의 의학적 전문성과 정신분석적 정체성을 통합하고,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의 상호교류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정신분석의 다학제적 다양성을 더욱 실질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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