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기다리는것 – 최승자의 시로 읽는 분석가의 또 하나의 상실 To Live and Wait - Another Loss the Analyst Must Bear Through the Poetry of Choi Seung-ja
권하영 2006-10-26
환자들이 남긴 피드백 가운데 오래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다. 내 해석은 다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말들이 상처가 되어서, 나를 다시 만나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고 했다. 대부분 처음 한두 번, 길어야 세 번째 만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내가 감정이 풍부하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 태도가 상담실에도 당연히 묻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방 안에서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하고 있던 대상은 내 해석이었던 것 같다. 크고 그럴듯하고 의미 있어 보이는 해석이, 작고 섬세하고 말로 설명하기도 애매한 무언가를 눌러 버렸다.
위니컷은 일흔이 넘어 쓴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It appals me to think how much deep change I have prevented or delayed in patients in a certain classification category by my personal need to interpret." (Winnicott, Playing and Reality, 1971, p711)
그는 예전에는 "영리했다는 느낌(the sense of having been clever)"을 즐겼다고도 털어놓는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를 들킨 것 같았다. 위니컷 같은 사람도 그 즐거움을 내려놓기까지 그토록 오래 걸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동시에 그 즐거움이 저절로 놓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서 무겁게 다가왔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쓴다.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크고 의미 있는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 비유다. 지금 여기 있는 고통을 더 큰 이야기로 옮겨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상담실 문을 연 사람은 오늘의 닭고기를 씹고, 오늘의 눈물을 삼키고 있다.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 삶의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무엇을 씹고 무엇을 삼키고 있는지를 함께 바라봐 줄 사람이다.
시인은 또 말한다.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똑똑한 분석가가 되는 일이 내가 이루려고 했던 모습은 아니다. 앎은 어쩌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러난 자리에서 분석가는 무엇을 할까….. 위니컷은 이렇게 말을 한다. "If only we can wait, the patient arrives at understanding creatively and with immense joy." (Winnicott, Playing and Reality, 1971, p711)
시인도 이렇게 답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 살아, / 기다리는 것이다 /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시인의 기다림은 보상받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다. 꺾이기 위한 기다림이다. 분석가의 기다림도 그렇다. 환자가 나를 떠나고, 나를 비판하고, 내가 준비해 둔 멋진 해석 없이 스스로 알아내는 것을 견디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보다 먼저 "죽는 게 아니다"라고 못 박아 두었다. 꺾이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네 꽃병에 꽂아 다오." 꺾인 꽃은 꽃병 속에서 바로 죽지 않는다. 한동안 더 핀다. 나는 이 구절이 위니컷의 「The Use of an Object」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는 분석가를 꺾는다. 분석가는 보복하지도, 무너져 사라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피어 있다. 그렇게 살아남을 때 분석가는 비로소 환자가 마음속에서 지어낸 대상이 아니라,환자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분석가는 자기 해석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의 꽃병에 꽂혀서도 살아 있는 꽃이다.
그렇다면 꺾이는 쪽은 무엇을 잃는가. 이 물음은 나를 Erna Furman의 논문 「Mothers Have to Be There to Be Left」(1982)로 이끈다. 아이가 떠날 수 있으려면 어머니가 거기 있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어머니 곁을 떠나 탐색하고, "내가 혼자 했어"라고 말할 수 있다. Furman이 비추는 쪽은 그 장면의 어머니 편이다. 어머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경험, 아이에게 떠나보내지는 경험을 견뎌야 한다. 그것은 작지만 분명한 상실이고, 어머니는 그 상실을 애도하면서도 아이가 혼자 해낸 일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실에서 환자가 스스로 이해에 이르는 순간도 작은 떠남이다. 환자는 그 순간 "아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떠난다. 그 이해는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 된다. 내가 먼저 해석해 버리면 나는 떠나보내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자가 가야 할 길 앞을 가로막고 서 있게 된다. 어쩌면 내 해석은 떠나보내지지 않으려는, 계속 필요한 사람으로 남으려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분석가가 감당해야 할 상실은 종결 때 환자를 떠나보내는 일만이 아니다. 매 회기, 매 순간 "아는 자"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도 상실이다. 영리했다는 느낌,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잃는 일이다. 그것은 Furman의 어머니가 아이의 "내가 혼자 했어" 앞에서 겪는 작은 애도와 닮았다.
그러나 Furman의 어머니는 애도만 하지 않는다. 아이가 혼자 해낸 일을 기뻐한다. 위니컷의 고백도 상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앞의 문장을 이렇게 맺는다. "...and I now enjoy this joy more than I used to enjoy the sense of having been clever." (Winnicott, Playing and Reality, 1971, p711)
영리했다는 느낌을 잃은 자리에, 환자가 스스로 이해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는 다른 기쁨이 들어온 것이다. 상실을 애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기쁨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살아서, 기다린다. 무참히 꺾이더라도, 꺾인 채로 살아 있기 위하여.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 스스로 알아낸 것을 들고 내 곁을 떠날 때, 그 뒷모습을 기뻐할 수 있기 위하여.
인용 문헌
· Winnicott, D. W. (1971). The Use of an Object and Relating through Identifications. In Playing and Reality. London: Tavistock.
· Furman, E. (1982). Mothers Have to Be There to Be Left. The Psychoanalytic Study of the Child, 37, 15–28.
· 최승자. (2026)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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