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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무의식

11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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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선 2026-09-11


나는 문학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학창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조금 뜻밖의 일이다. 그때 나는 문학보다 과학 전집을 더 좋아했다. 문학이라야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을 읽는 정도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1+1=2처럼 답이 분명한 것을 좋아했다. 수학에서도 실수가 허수보다 좋았다. 손에 잡히지 않고,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어딘지 불편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허수도 제법 좋아한다.


어쩌면 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된 일도 이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1+1=2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다소 우연했다. 어느 날 시를 몇 편 써놓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게 시가 되나?’ 그래서 한 문예지에 보내보았고, 뜻밖에도 신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게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이렇게 오래 읽고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를 계속 쓰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를 읽게 되었고, 읽다 보니 점점 재미있어졌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시와 정신분석이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둘 다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향한다.


둘 다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만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어떤 것이 말이 되어가는 순간을 기다린다.


얼마 전 소설가 마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무의식과 창작에 관한 몇 문장을 만났다.


로빈슨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인간의 내면과 신앙, 가족과 공동체를 오랫동안 탐구해온 작가이다. 『길리아드(Gilead)』, 『홈(Home)』, 『릴라(Lila)』 등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으며, 『길리아드』로 2005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창작이 반드시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어떤 문제를 오래 붙잡고 있다가 내려놓았는데, 며칠 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문장이 떠오른 경험이 있다. 쓰이지 않던 글을 잠시 덮어두었다가 다시 펼쳤을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갑자기 보이기도 한다. 애써 생각할 때에는 나오지 않던 말이 산책을 하거나 잠들기 직전, 혹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내가 생각을 멈춘 동안에도 마음의 어딘가에서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을 단순히 ‘의식이 쉬는 동안 대신 문제를 풀어주는 두뇌의 작업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적 무의식은 훨씬 낯설고 복잡하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아 했던 것과 아직 알 수 없었던 것이 함께 있다. 욕망과 두려움, 기억과 환상, 대상과의 관계에서 남은 흔적들이 서로 뒤섞인다. 하나의 표상이 다른 표상과 결합하고, 어떤 것은 응축되고 어떤 것은 치환된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감정 속으로 스며들고, 한때 말이 될 수 없었던 것이 이미지나 꿈, 행동, 신체감각, 혹은 뜻밖의 한 단어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작업’은 정답을 찾아내는 계산이라기보다 변형에 가깝다.


마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시 배열하고, 연결하고,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와 정신분석이 만난다고 생각한다.


시를 쓸 때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쓰려는지 정확히 알고 시작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어떤 이미지 하나,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단어 하나, 설명할 수 없는 리듬이나 감각에서 문장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인 자신도 모른다.


그런데 쓰다 보면 그것들이 서로를 불러낸다.


한 단어가 오래전의 장면을 데려오고, 한 이미지가 잊고 있던 감정을 불러내며,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기억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만난다. 그리고 뒤늦게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를 발견한다.


나는 이것이 정신분석적 장면과도 닮아 있다고 느낀다.


분석에서도 환자가 자신의 마음을 모두 알고 와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석실에서는 자신도 왜 말했는지 모르는 한마디, 엉뚱하게 떠오른 기억,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 말하다가 갑자기 생긴 침묵 같은 것들이 중요해진다.


분석가는 그것들을 서둘러 설명하기보다 곁에 두고 바라본다.


당장 뜻을 정하지 않은 채 함께 머무른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였던 것들 사이에 연결이 생긴다. 한때 행동으로만 표현되던 것이 감정이 되고, 감정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말이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치료가 언제나 새로운 무엇을 ‘가르치는’ 과정만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로 치료자는 환자의 마음속에 전혀 없던 것을 넣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형태를 얻지 못한 작업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에 가깝다.


무언가가 말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


이해가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침묵.


서로 연결되지 못했던 경험들이 만나기까지 필요한 공간.


정신분석은 어쩌면 그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 역시 그러하다.


시인이 찾아낸 단어는 무의식 깊은 곳에 완성된 채 묻혀 있던 ‘진실’을 그대로 끌어올린 것이라기보다, 아직 말이 없던 경험이 언어와 만나는 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에 가까울 것이다. 언어가 경험을 표현하는 동시에 경험 자체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쓰고 난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게 한다.


어떤 시는 시인이 알고 있던 것을 적은 것이 아니라, 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을 담는다.


환자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오랫동안 반복하던 행동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호한 불편함이 하나의 감정으로 느껴지는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전과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게 되는 순간. 그때 경험은 단순히 ‘설명된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것이 된다.


말은 과거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과거가 마음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시의 작업이면서 동시에 분석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의 나는 분명한 것을 좋아했다.

1+1은 반드시 2여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상태로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너무 빨리 이해하려 하면 오히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시 앞에서도 그렇고, 환자의 마음 앞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일이 필요하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과 생각을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두는 일. 내가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견디면서 그 안에서 무엇이 생겨나는지를 기다리는 일.


아마도 나는 문학을 읽고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허수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믿게 되었으므로.


우리 안의 어떤 경험들은 오래도록 말이 되지 않은 채 머문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느 날 그것은 꿈이 되고, 이미지가 되고, 한마디 말이 되고, 때로는 한 편의 시가 된다.


정신분석가가 하는 일 역시 어쩌면 그 순간을 함께 기다리는 것인지 모른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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