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티크라이스트로 본 애도와 멜랑콜리아
배하나 2026-09-23
인상깊게 본 영화 중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이야기 자체가 워낙 잔혹하고 섬뜩하기도 하여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때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떤 겨울 밤. 3살배기 아이가 열린 창문으로 추락한다. 부부가 사랑을 나누고 여자가 절정에 다다른 바로 그 순간이다. 여자는 아이에 대한 상실과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남자는 아내를 고통에서 구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필이면 남자는 심리 치료사이다. 상실의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며, 아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곳은 숲이다. 아내는 작년에 그곳에서 자신의 연구를 하며 아이와 여름 휴가를 보냈다. 그 연구는 어떻게 중세의 여성이 마녀로 몰리며 희생당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한 밤에 지붕을 때리는 우박 같은 큰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나무들에서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이다. 여자는 그것이 도토리가 죽어가면서 내는 소리라고 한다.
여자는 점차 그곳에서 생기를 얻는 듯하다. 남자는 아이의 부검소견서를 본다. 아이의 신발이 짝짝이로 신겨져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연히 아내와 아이의 1년전 사진을 발견했는데 그때의 아이의 신발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그때에도 아이의 신발은 짝짝이로 신겨져 있었다. 아내의 연구 자료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각종 잔혹한 고문 장면들, 그리고 마녀에 대한 이야기들. 남자는 무서운 직감이 든다. 여자가 무서워하는 것, 그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는 nature, 그 위에는 evil을 써 놓았었다. 남자가 꼭대기에 me(그녀 자신)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여자가 그를 공격한다. 그의 다리를 쇠꼬챙이로 뚫고 무거운 돌에 그를 매어둔다. 여자는 그의 눈 앞에서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자른다. 다시 영화의 처음 장면이다. 여자는 아이가 죽는 순간 눈을 감지 않았다. 절정에 이르러 눈을 뜨고 아이가 떨어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실제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분명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공격하는 여자를 죽인다. 탈출한 그는 산속을 헤매다가 산딸기를 따먹는다.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의 환영이 숲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여러가지 영화에 대한 해석이 많지만, 나는 내가 왜 이 영화에 끌리는 지에 생각해보았다.
여자는 숲을 무서워한다. 숲은 nature, 즉 본성이다. 그리고 악마적이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악마적인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death instinct가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자책한다. 그러나 그 자책은 너무나 과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물어 클리토리스를 제거한다. 그래도 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아이가 죽는 순간 정말 눈을 뜨고 있었을까? 눈을 뜨고 있었다면 그녀 생각에, 그녀는 마땅히 죄인이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죽어야만 한다.
관점을 돌려보자. 그나저나 남자는 왜 고통스러워하지않는가? 아이는 아내의 아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남자의 아기이기도 하다. 그는 아내가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라고 아내를 설득한다. 남편은 아이를 너무나 빨리 마음속에서 떠나 보낸 것 같다. 남편의 애도는 과연 건강한가? 여자는 남자의 손에 굳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남편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도 평생 죄인으로 살기를 바랬다. 죄인이 된 그는 열매를 따먹는다. 그 열매는 그 숲에서 수없이 죽어갔던 수많은 도토리들, 마녀들의 시체를 먹고 자랐다. 그는 그 죽음을 먹고 살아남고, 그렇게 죽은 아이와 연결된다.
여자는 아이가 죽는 그 순간 눈을 감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아이의 죽음이 애도가 되는 순간, 그녀는 아이를 떠나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죄인이 되어서라도 아이와의 연결을 지속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려면 그녀는 자신의 죄를 ‘물어야만’했고, 눈을 ‘뜨고 있었어야만’ 했다.
멜랑콜리아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를 떠나 보내게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차라리 자신의 death instinct로라도 대상을 감싸고 자신을 공격하면서라도 자기 안에 대상을 영원히 두는 것. 그것이 남편의 소위 ‘애도’(라고 주장하는)하는 방식을 지켜보고, 그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Comments